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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레이디 조지애나 - 라이스 보엔 (김명신 옮김,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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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06-1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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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스코틀랜드 래녹 성에 사는 21살의 조지애나(이하 ‘조지’)는 세계의 절반을 호령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왕족이지만 “남은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답답한 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래녹 성의 공작인 이복오빠 빙키가 메리 왕비와 짜고 자신을 몰락한 동유럽 왕조로 시집보내려 하자 조지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곤 런던으로 가출합니다. 하녀 한 명 없이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겪으며 고난의 홀로서기에 나서지만 조지는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끔찍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집안 욕실에서 한 남자가 익사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경찰은 그 남자와 만나기로 돼있던 이복오빠 빙키는 물론 조지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결국 조지는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일단 설정 자체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1932년의 영국이 배경인 점도,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음울한 분위기에 거의 파산 일보 직전인 래녹 성에 갇힌 채 청춘을 갉아먹고 있던 ‘무늬만 왕족’인 21살의 조지가 살인사건 로 활약한다는 설정도 눈길을 끕니다. 또 조지가 런던에서 만난 다양한 조연들도 그 면면이 독특합니다. 왕족이지만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이복오빠 빙키를 비롯하여 우연히 재회한 스위스 귀족학교 동창생들, 2년 전 사교무대에서 만났던 아일랜드 귀족 가문의 자제, 어머니의 복잡한 남성편력 때문에 유년기에 잠시 가족이 됐던 남자 등이 그들인데, 문제는 적잖은 인물들이 살인사건 조사에 나선 조지를 꽤나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런던에서의 홀로서기를 도와주던 절친은 물론이거니와 노골적으로 대시하며 조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남자들마저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할 수 없는 구석들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확신한 조지는 경찰의 의심을 뒤집기 위해 왕족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신’을 거듭하며 분투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절반쯤은 ‘골 때리는 왕족’ 조지의 런던 정착기에 할애됩니다. 다소 지나칠 정도의 우연들을 통해 런던에서 여러 남자와 재회한 조지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932년을 배경으로 한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흥분과 경계와 두근거림을 번갈아 경험합니다. 왕족으로 살아온 탓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집안일에 당황하는 장면들도 유쾌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집안 욕실에서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조지의 상황은 180도 급변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지의 타고난 성정들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가문의 품격과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까지 함부로 결정당하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반골 스타일은 물론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진실을 향해 폭주하는 대단한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조지는 그 어떤 장르물의 여주인공보다 매력적이고 흡인력이 강합니다. 이 시리즈가 17편까지 이어진 건 거의 전적으로 조지의 캐릭터 덕분이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된 우연과 작위적인 상황들 때문에 조지의 추리와 조사는 현실감이 떨어지곤 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왕족 출신의 초짜 탐정인 조지가 들처럼 뛰어난 추리와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기막힌 미스터리 로 활약하는 것 자체가 더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결국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감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유머러스하게 그린 코지 미스터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탐정 입문기” 정도의 기대감만 갖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있는 책읽기를 경험할 순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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